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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남] 작은 불꽃의 기적

2019-05-17 입력 | 기사승인 : 2019-05-17

작은 불꽃의 기적


시작이 어렵지, 막상 해보니 길이 있었다.


2005년, 재가노인복지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일이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가정봉사원 파견사업 대상자였던 송 할머니 댁에 찾아갔더니 못 보던 아이 셋이 와 있었다. 할머니는 머리를 싸매고 드러누워 끙끙 앓고 계셨고, 세 살, 다섯 살, 여덟 살 손주들은 마당에서 신나게 뛰어놀고 있었다.


할머니께 자초지종을 여쭤보니, 인근 도시에서 가정을 꾸리고 살던 아들이 자살했고, 며느리는 집을 나가버려서 보살필 사람이 없어 손주들이 갑자기 집으로 오게 됐다는 것이다. 할머니 댁 마당에는 잡초가 무성하고 화장실은 마당 끝에 재래식 화장실이 있어 아이들이 거주하기 어려워 보였다.


부엌 역시 옛날식이라 꼬부라진 허리로 겨우 밥솥에 밥을 끓여 드시고, 우리 시설에서 일주일에 2번 가져다드리는 반찬으로 겨우 지내는 형편이었다. 생활환경도 이렇게 열악한데, 혼자서 어린 손주 셋을 돌봐야 한다는 사실에 걱정스러운 나머지 마음의 병이 몸으로 온 것이다.


우리는 일단 집 안팎의 환경을 점검하고, 직원 및 주변 관계자들과 긴급회의를 열어 쉬운 것부터 하나씩 차근차근 문제를 풀어나가기로 했다. 한여름인데 안방 모기장이 다 찢어져 아이들 온몸에 모기에게 물린 자국이 그득했다.


당장 모기장을 새로 달고, 네 사람이 먹을 수 있도록 반찬 양을 늘렸다. 무엇보다도 아이들이 쓸 수 있는 화장실로 바꾸는 것이 급선무였다. 처음에는 재래식 화장실을 수세식으로 바꿀 계획을 세웠지만, 설비 문제가 만만치 않았다. 고민 끝에 부엌 뒤쪽에 작은 공간을 수세식 화장실로 만들기로 했다. 정화조는 마당에 묻으면 됐지만, 급수와 하수 배관 설치를 위해 굴착기가 필요했다.


주변 공사장과 연결된 중장비회사에 부탁하여 구덩이 파는 날과 덮는 날, 두 번 공사를 해주기로 했다. 그런데 정작 공사하는 날 마당 안으로 장비가 들어와야 하는 데, 이웃집 담장에 걸려서 진입 자체가 어려웠다. 부랴부랴 동네 이장님과 이웃집 주인에게 사정사정하여 담장을 다시 쌓아주기로 약속하고, 허문 다음에야 일을 진행할 수 있었다.


고맙게도 공사 소식을 들은 면사무소 직원들이 변기와 세면대 등을 후원해 주었다. 배관은 평소 알고 지내던 배관 기술자에게 부탁하여 이틀간 무료로 봉사를 해주었다. 배관을 하고 타일을 붙이고 시멘트 작업을 하는 것도 예삿일이 아니었다. 방 도배와 마당의 잡초들은 우리 실버타운 봉사자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4일에 걸쳐 작업한 끝에 깨끗하게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방 싱크대가 문제였다. 나무가 다 썩어서 내려앉아 있었다. 할 수 없이 할머니 딸에게 연락하여 싱크대 하나만 해달라고 어렵게 말을 꺼냈다. 딸도 형편이 넉넉하진 않았지만, 지역에서 모두 힘을 합쳐 돕고 있다는 것을 고마워하며 흔쾌히 응해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마루에서도 놀 수 있도록 방충망을 설치하자고 이야기를 꺼냈다. 마루 전체에 창틀과 방충망을 설치하는 데만도 비용이 적지 않았다. 하지만 다행히 여기저기서 십시일반으로 방충망 값을 모을 수 있었고, 지원해준 자원봉사자 덕분에 인건비도 해결되었다.


관계자들과 회의를 했을 때, 처음의 암울했던 분위기는 점점 희망찬 분위기로 바뀌었고, 다들 용기를 내는 것 같았다. 시작이 어렵지, 막상 해보니 길이 있었다.


방학이라 잠시 잊고 있었던 아이들 학교문제, 학원문제, 전입신고 등은 행정관서의 협조를 얻어 기초생활수급자 신청까지 완료하고 나니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쌀과 반찬, 옷가지 등 이웃들의 작은 온정이 이어졌고 사회단체들도 관심을 두기 시작했다.


머리를 싸매고 누웠던 할머니는 일어나서 병원에도 다니시고 아이들 밥도 챙기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마당 끝에 있던 재래식 화장실을 없애고 집안에 새로 만든 화장실이 아이들에겐 가장 큰 생활의 기쁨이었다.


게다가 설비 아저씨의 욕심으로 샤워기까지 부착하여 씻는 것도 훨씬 편리해졌다. 여전히 걱정은 많았지만 그래도 할머니가 힘을 내어 버티는 모습이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우리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아이들이 천진난만하게 뛰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저 아이들이 자라서 건강한 어른이 될 때까지 필요한 관심과 돌봄을 지속하리라 다짐했다.


할머니 댁 사례를 통해 앞날이 막막했던 한 가정이 우리의 작은 노력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을 직접 보고 느끼게 되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불을 일으키고, 주변 사람들이 그 불에 몸을 녹이듯이 작은 손길들이 모여 큰 열매를 맺은 것 같아 마음 한쪽이 따스해졌다.


요즘엔 지역사회에서 여러 기관과 단체들이 이런저런 봉사를 많이 하고 있다. 그러나 한 가정과 한 인간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되기까지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사례관리하기는 쉽지 않다. 노인들도 아이들도 늘 변하기 때문이다. 어렵고 힘들지만, 그 변화에 맞춰 우리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복지를 해야 할 것이다.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맛 본 성취감을 발판삼아 앞으로도 꾸준히 변화하는 복지를 하기로 글을 통해 홀로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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