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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옥] 외로움을 견디는 힘!

2019-05-17 입력 | 기사승인 : 2019-05-17

외로움을 견디는 힘!


노인복지를 향한 꿈과 의욕에 불타 겁 없이

첫발을 내디딘 지 24년. 숱한 사연과 가슴 저린 사연들을 만나왔다.


노인복지를 향한 꿈과 의욕에 불타 겁 없이 첫발을 내디딘 지 24년.


숱한 사연과 가슴 저린 사연들을 만나왔다. 내가 좀 더 노력했다면 더 나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어찌 나에게만 해당하는 일이겠는가. 하지만 그때 나보다 더 훌륭한 사회복지사를 만났더라면 그 죽음을 조금은 늦출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좀처럼 떨쳐버릴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


당시 나는 1996년 일본에서 개호복지사 자격증을 딴 뒤, 서둘러 한국으로 귀국했다. 일본에서도 취업할 수 있었지만, 내 나라에 일본처럼 다양한 노인복지 프로그램을 도입하는 것이 바로 내 사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해 5월, 대전시청에 구직신청서와 자기소개서를 제출했던 일을 계기로, 사회복지법인 선우복지재단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우리 재단에서는 가정봉사원파견센터와 가정봉사원 교육원을 함께 운영하고 있었고, 노인요양원도 부속되어 있었다.


나의 첫 업무는 우리 기관의 대상자이신 어르신들 50분께 매일 아침 도시락을 배달하는 일과, 교육원을 운영하는 일이었다. 특히 봉고차 한 대로 오전 중에 도시락을 전부 배달하는 것이 큰일이었다.


어느 날, 도시락 배달을 마치고 들어온 동료 복지사가 한숨을 내쉬며 걱정하는 말을 들었다. 동구 천동에 사시는 한 할아버지의 사연이었다. 매일 술만 드시고 식사를 안 하신 지 며칠이나 지났는데, 그러다가 큰일이 날 것 같아서 너무 걱정된다는 것이었다. 나는 어르신의 상황이 그렇게 안 좋다면 병원에서 치료를 받도록, 그리고 우선 단기보호센터를 이용하시도록 설득해보자는 생각으로 그다음날 바로 도시락 배달에 따라나섰다.


어르신이 사시는 곳은 후미진 달동네였다. 동료와 나는 도시락을 들고 부지런히 언덕을 올라갔다. 언덕 중턱에 자리한 할아버지 댁은 방 한 칸짜리 오두막집이었다. 그날 역시 할아버지는 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 하고 계셨고, 이부자리는 대소변으로 완전히 젖어있었다. 도저히 할아버지와 이야기를 나눌 수 없는 상태여서 나머지 도시락을 마저 배달한 뒤에 다시 와서 할아버지를 씻겨드리기로 했다.


도시락 배달을 서둘러 마치고 센터에서 할아버지가 입을만한 옷가지와 이부자리를 챙겨 들고 다시 할아버지 댁을 찾았다. 이제 술이 깨서 정신이 좀 드시는지 겸연쩍어하는 할아버지를 설득하여 남자 복지사가 목욕을 시켜드렸다. 그동안 우리는 젖은 이부자리를 걷고, 방을 청소하고 새 이불을 깔아드렸다. 나는 옷을 갈아입고 나오시는 어르신의 손을 붙들어 자리에 앉히며 “어르신, 계속 이렇게 지내시다가는 정말 큰일 나요. 몸이 다 망가져서 얼마 못 사실 수도 있으니까, 저희랑 같이 시설로 가셔서 건강이 회복될 때까지만, 다만 며칠이라도 좋으니 함께 지내요.”라며 간곡하게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죽어서나 나올 수 있는 곳을 내가 왜 가냐”라고 펄쩍 뛰며 손사래를 치셨다. 단기보호센터는 그런 곳이 아니라고 설명해드려도 도무지 들으려 하지 않으셨고, 그럼 며칠만 병원에 입원하시는 게 어떻겠느냐 권해도 “거기 입원하면 내 좋아하는 술도 맘대로 못 먹잖아. 난 싫어. 나 편한 데서 살면서 내 좋아하는 술 맘대로 먹다가 죽으면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어”라며 완강한 태도를 보이셨다. 몇 시간에 걸쳐 설득해보았지만 어르신의 생각은 좀처럼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두고만 보다가는 정말 큰일이 날 것 같아 동사무소 담당자를 찾아가서 어르신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단기보호센터 이용이나 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그런데 명함을 내놓는 순간 담당공무원은 “아무리 가족이 없어도 시설 입소를 하려면 당사자 승낙 없이는 절대 안 됩니다.”라며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우리를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어르신을 걱정하는 우리의 마음이 입소노인을 찾으러 다니는 상업적인 것으로 치부되는 것 같아 다 걷어치우고 그 자리에서 뛰쳐나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그럼 병원에 입원하시게 해서 상태가 좋아지면 퇴원해서 생활하시라고 공무원인 선생님께서 권해주시면 어르신 생각이 조금은 바뀌지 않겠어요?”라며 그를 설득했다. 하지만 그는 “어르신을 입원시키려면 보호자서약이나 입원비 책임 등 모든 것을 제가 작성해야 해요. 그런 책임은 질 수가 없네요.”라고 딱 잘라 거절하였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센터에서 늘 이용하는 병원 원무과에 전화하여 사회복지사가 입원 시에 보호자를 대신할 수 있는지 물었더니, 입원 당사자의 승낙이 필요하다는 말만 되돌아왔다. 의료적 지식이 없는 사람이 봐도 생명이 위험한 상태인데 당사자가 거부하면 시설 이용도, 병원 입원도 할 수 없다니……. 사회복지사로서 무력한 내 모습에 뒤늦게 몰려온 피곤함이 온몸을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터덜터덜 센터로 돌아와 아무리 생각해봐도 뾰족한 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무슨 방법이 있지 않을까 하여 구청·시청 관계자들과 의논하다가 이틀이 지났다. 그날 아침, 센터 전화기가 울렸다. 아침에 도시락 배달을 나갔던 사회복지사였다.


“선생님, 어떡해요. ○○ 어르신 돌아가셨어요.”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이후에 동료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잘 들리지 않았다.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한참을 멍하게 있다가 겨우 119와 파출소, 동사무소에 신고하고, 사후처리를 하면서도 ‘왜 좀 더 빨리, 더 적극적으로 이 문제에 뛰어들지 않았을까?’ 하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할아버지 장례식을 치른 후, 자원봉사자들이 방을 정리하다가 우연히 장판 밑에 깔린 만 원권 여러 장을 발견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순간 ‘할아버지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정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를 위한답시고 뛰어다녔던 며칠간의 일들이 진정 어르신이 원하고 필요로 하는 일이었는지 생각해보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할아버지의 죽음이 사회적인 자살방조는 아니었나?’,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 삶을 놓아버리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연명의료제도가 시행되고,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기관이 2018년 현재 전국에 48개가 있고, 국민건강보험공단지사 178개소에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위한 상담·등록을 지원하게 되었다. 웰다잉 교육이 자연스럽게 이해되고 받아들여진 지금, 이제는 상황이 좀 달라졌을까?


얼마 전, 평소 알고 지내던 사회복지 전담 공무원에게 이런 사례를 어떻게 해결하는지 물은 적이 있다. 여전히 당사자의 승낙 없이는 절대 입원 등을 할 수 없고, 가족이 없을 때는 더욱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가족과 살든 혼자 살든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생명마저 아무렇지 않게 외면해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그 어느 때보다 지역 안에서 서로를 안아주고 손잡아 주는 커뮤니티 케어가 절실하다.


오늘도 나는 사무실 앞 작은 돌 마루에 앉아 이야기 나눌 사람을 찾아 걸음 하신 어르신들과 쌍화차를 한 잔씩 나눈다. 외로움과 헛헛함을 이길 힘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 같다. 우리 사무실을 찾아오신 어르신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마음속으로 ‘계속 그렇게 힘을 내주세요.’ 하고 가만히 외쳐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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