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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삶은 기적이다 : 현대의 미신에 대한 반박

2013-06-10 입력 | 기사승인 : 2013-06-10

 이 책을 읽고 나니 「생활의 조건」의 저자와 같았습니다. 그 순간, '제 관심이 이런 것이구나'하고 느끼기도 했고 '도대체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내 관심을 끌까?'하고 생각했습니다.
「생활의 조건」의 부제는 '사람을 노동시장의 필수품으로 보는 천박한 관점에 반대한다'이고, 「삶은 기적이다」의 부제는 '현대의 미신에 대한 반박'입니다.


 농부이면서 시인이자 철학자인 미국인 웬델 베리. 그는 우리 삶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계를 마치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는 과학주의를 경계합니다. 세상 모든 일을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는 교만이 인류를 위험에 빠뜨린다고 합니다. 이 과학주의는 세상을 숫자로 이해하고 분석합니다. 이런 분석을 기술의 진보로 여깁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가 생명을 기계적으로 다루게 하는 현상을 불러옵니다. 인간을 기계의 부속품과 같이 취급하는 시대로 더욱 몰아갑니다.

물론 내가 지금 과학이나 그 외 다른 지적 학문분야의 폐기를 제안하는 것은 아니다. 그게 아니라 그 기준과 목적의 변화를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행동의 기준은 기술적인 능력이 아니라 지역과 공동체의 성격에 근거해야 한다. 24쪽


웰덴베리가 비판하는 과학주의는 기술로 세상 모든 것을 증명하려 하고, 설명하지 못하는 것은 미신으로 몰아가는 관점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기술의 진보만이 사회의 발전을 의미합니다.
우리도 우리 현장에서 만나는 어려운 사람의 삶을 기계적으로 분석하지 않았는지, 다양한 사회과학적 기술 동원에만 힘쓰지 않는지 돌아봅니다. 이런저런 이론과 경험으로 당사자의 삶을 분석하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 해결하려고만 하는 사이, 우리는 그가 살아 있는 한 끝까지 사람이길 원한다는 걸 잊기 쉽습니다.


웬델은 우리가 안다고 하는 지식이 얼마나 불완전한지, 그리고 그 아는 지식조차 세상 이치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삶을 경험한다는 것은 뭔가를 “알아내거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고통받는 것이며, 동시에 있는 그대로 삶을 기뻐하는 것이다. 고통받으면서, 또 있는 그대로 기뻐하면서 우리는 삶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아가서 우리는 생명을 이해했다는 누군가의 주장에 의해 생명이 소유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생명은 우리가 향유하는 것이지만, 우리 너머에 있다. 어떻게 해서, 왜 우리가 생명을 누리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것은 예측할 수 없다.
…블레이크가 말했듯이 생명은 거룩하다. 생명에 대해 달리 생각하는 것은 생명을 노예화하는 것이며, 예견하건데, 인간이 아니라 생명의 어리석은 주인들이라는 소수의 인간 종자를 만들어낼 뿐이다. 19쪽

우리가 살아 숨 쉬는 존재라는 것이 이미 기적이요, 감사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늘 이런 사실을 중심에 두고 도와야 합니다.



현대의학에서는 환자 개인을 그들의 삶으로부터 분리해서 나이와 성, 병력, 경제적 상태 등 어느 특정한 범주의 대표자나 표본으로 대하려는 경향이 있는데, 이것은 환자에 대한 모욕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과학자들조차도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에는 “한 여성”, “한 남성”, “한 아이”, “한 사례”와 같은 범주적 언어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정을 느낄 때 우리는 추상과 추상화의 범주를 깨부수고, 고유한 생명과 장소를 지닌 피조물 그 자체와 대면하고 싶어 한다. 64~65쪽


사회복지사에게 충고하는 듯합니다.
우리가 만나는 어려움에 놓인 이, 구체적인 그 사람을 가리킬 때 '사례'로 혹은 '케이스'로 부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그 속에 인간에 대한 애정이 사라지고 단지 사회사업적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관점이 녹아있지는 않는지 경고합니다.


「생활의 조건」에서는 이러한 근대의 모순을 넘어서기 위해 결국 '공동체'의 강화를 이야기합니다. 특히 “튼튼한 공동체와 튼튼한 지역경제는 동일한 것”239쪽 이라 말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의식 있는 여러 사람이 강조합니다. 왜 조금 비싸더라도 마트 대신 동네 슈퍼마켓을 이용해야 하는지, 되도록 가까운 지역의 물건을 구매해야 하는지, 여행을 가서도 현지 주민들이 직접 운영하는 민박이나 음식점을 이용해야 하는지 웬덴 베리를 통해 다시 확인했습니다.

간디의 말처럼 작은 마을이 세계를 구한다는 것입니다. 작은 마을 공동체를 살려내는 작업은 공동체를 이루는 최소 단위인 개개인들의 관계를 다시 설정하는 일입니다.
어떻게 죽기를 원하느냐…티레시아스가 오디세우스에게 예견했고, 호머가 권장했듯이 잘 아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축복과 평화 가운데” 집에서 죽기를 원하는가? 아니면, 어디서든 최고 의료 전문가들의 손에 죽기를 원하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그것이 서로 다른 두 가지 삶의 방식을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의미 있는 질문으로 여겨지지 않을 것이다. 213쪽

 

 

함께 보면 좋을 다큐멘터리 한 편 소개합니다.
「KBS 스페셜- 미국농부 조엘의 혁명」, KBS, 2010.10.23

 

소를 소답게, 돼지를 돼지답게 키워야 한다고 주장하는 미국 폴리페이스 농장의 조엘.
현대의 산업화한 사육시스템 공장식 밀집 사육 속에서 키우는 가축들은 상품으로 관리합니다. 먹이도 상품성을 높이기 위해 만든 사료이고 질병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정기적으로 약을 복용합니다. 하지만 이런 가축들이 오히려 조엘이 방목하여 키우는 가축보다 질병에 걸릴 확률이 훨

씬 높다고 합니다. 그는 자연의 생명력을 신뢰합니다. 하늘이 키운 풀에 온갖 영양분이 들어 있으니 이를 먹이면 되고, 가축 또한 나름의 방식으로 좋은 풀을 골라 먹는 능력이 있어 이를 믿으면 됩니다.

조엘의 농장에서 하는 일 대부분은 이처럼 자연에 맡기는 방식입니다. 하지만 그는 이것이 새로운 방식이 아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오래전부터 그렇게 해왔다고 합니다. 단지 잊고 있었을 뿐이라고 합니다.
스스로 자본주의자이면서 생태주의자라고 말하는 조엘. 이윤을 추구하지만 그 과정이 건강해야 결국 더 큰 이익이 찾아온다고 합니다.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이 자신과 소비자에게, 나아가 환경에 이로울 때 진정한 이익이요, 그래야 사업도 계속될 수 있다고 합니다.


조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걸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가축의 대안적 사육 방식을 넘어 육류 소비에 대한 우리 생활의 근본적 성찰이 필요합니다.
우리의 육류 소비량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지금과 같은 산업화한 대량사육 시스템을 요구합니다. 그런 시스템 속에서 가축은 생명을 잃은 상품에 불과합니다. 인공수정으로 태어나 인공사료로 살찌고 항생제와 백신으로 자라는 상품. 또한, 생산과정에서 상품성을 잃은 가축은 산채로 폐기합니다. 조엘의 농장을 따라 하기 이전에 이렇게 대량으로 생산하게 하는 우리의 식생활 문화를 돌아봐야 합니다.


여기서도 근본을 생각합니다.
건강하고 질 좋은 고기를 공급받는 시스템을 만드는 일도 중요하지만, 그런 시스템은 대량생산을 불러오는 대량소비의 결과일 수 있습니다. 우리 삶을 바꾸는 식생활에 대한 진지한 성찰은 우리 삶을 풍요롭게 할 뿐 아니라 뭇 생명에 대한 존엄도 생각하게 합니다. 또한, 구조적 변화를 위해 내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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