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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옥] 봄날은 간다

2019-05-17 입력 | 기사승인 : 2019-05-17

봄날은 간다


이제 조 할머니의 고통스러웠던 세월도, 기억도

쉬이 지나가기를 가만히 바라본다.


“아이고, 속상해. 조 할머니 정말 왜 그러신데? 하다하다 이젠 자기 약까지 몰래 드리니…….”


“김 할아버지를 완전히 사육시키고 있어요. 매주 몸무게가 불어나시니 너무 걱정이에요.”


직원회의 시간에 조 할머니의 행동에 대한 걱정들이 오고갔다. 간호사는 조 할머니 한 분만의 문제가 아니라 김 할아버지, 이 할머니, 주변 어르신들에게까지 영향을 준다며 조 할머니에게 좀 더 관심을 가져달라고 직원들에게 간곡하게 당부했다.


우리 임마누엘실버홈에는 연배가 비슷한 김 할아버지와 조 할머니, 이 할머니가 계신다. 세 분 사이에는 매일 싸움이 끊이질 않고 있다. 김 할아버지는 이 할머니가 마음에 드시는지 기회만 있으면 슬그머니 옆자리에 앉으려 하시고, 그러면 조 할머니가 득달같이 달려와 둘 사이를 비집고 앉게 되는데, 그때부터 큰 소리가 오가는 것이다.


더 큰 일은 조 할머니가 양쪽 방을 오가며 이 할머니와 김 할아버지를 감시하느라 밤새 주무시지 않았고, 아침이면 거실에 나와서 “어젯밤에 두 ××이 한방에서 잤는데, 이런 것들을 그냥 내버려 두냐”며 직원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지른다는 것이었다.


그 때문에 입소하실 때만 해도 곱고 여유로웠던 조 할머니는 하루가 다르게 얼굴 표정이 굳어졌고,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아 몸이 말라갔다. 직원들은 이 문제로 몇 번이나 회의했지만 뾰족한 수를 생각해내지 못했고, 조 할머니의 집착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오늘도 같은 패턴으로 조 할머니는 이 할머니에게 시비를 걸었고 참지 못한 이 할머니가 조 할머니를 밀자 넘어지면서 한쪽 손목이 골절되어 깁스하고 약을 받아오게 되었다. 간호사는 시간에 맞춰 약을 드시게 했는데, 어찌 된 영문인지 조 할머니가 김 할아버지에게 약을 내밀며 몸에 좋은 약이니 드시라며 권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깜짝 놀란 요양보호사는 약을 드시려던 김 할아버지를 막았고, 조 할머니가 이를 보고 난동을 부리시는 바람에 센터 전체에 소란이 일게 되었다.


요양보호사는 간호사에게 약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고 한마디 했고, 간호사는 직원들에게 조 할머니가 김 할아버지에게 세 끼 식사와 간식까지 다 드리는 것을 내버려 두어서, 2개월 사이에 김 할아버지 몸무게가 6kg이 늘어 거동조차 힘들게 되었다며 조 할머니에게 더 관심을 가져달라고 맞받아쳤다.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뒤, 전날 야근을 했던 직원은 아침 조회 때 조심스럽게 조 할머니에게 전문적인 상담이나 치료가 필요한 것 같다면서, 지난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 해주었다.


“밤에 어르신들 잠자리를 살펴드리느라 각 방을 돌아다니는데 목욕실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나는 거예요. 문을 열어보니 김 할아버지와 조 할머니가 이동식 목욕침대를 만지고 계셨죠. 깜짝 놀라서 왜 거기 계시냐고 여쭤봤더니 조 할머니가 ‘여기서 신접살림을 차리려고 방을 만들고 있어’ 라며 수줍게 웃으시더라고요.”


앞으로 조 할머니가 어떤 사고가 내실지 조마조마하다며 문제행동의 심각성에 관해 이야기 하였다.


조회가 끝난 뒤, 나는 ○○대학 노인전문간호학과 ○○○ 교수님께 이 문제를 상의 드렸다. 교수님은 석사과정 실습지도를 통해 알고 지내던 분으로, 미국에서 치매를 전문적으로 연구하셨던 분이다. ○○○ 교수님은 포커스 그룹 연구방법으로 방법을 찾아보자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조 할머니의 유일한 가족인 조카딸에게 전화하여 지금까지의 상황을 이야기하고, 할머니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개선할 방법을 함께 찾아보자고 권했더니 수화기 너머로 고맙다며 울먹이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때부터 교수님은 조 할머니의 조카딸, 원장, 사회복지사, 간호사, 요양보호사, 물리치료사 영양사가 한 팀이 되어 일주일에 한 번, 응접실에서 면담을 시작했다. 당사자인 조 할머니와는 심층 면담을 진행하였다.


첫 회기에 조카딸에게서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시설 입소 초기면접 때는 전혀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였다.


조 할머니는 열여덟에 옆 마을의 노총각에게 시집을 가게 되었다. 집안 어르신들과 부모님은 그 총각이 얼굴도 잘 생겼고, 집도 넉넉해서 밥은 굶기지 않을 것 같다며 결혼을 서둘렀다. 그런데 며칠 후, 조 할머니는 자신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본부인 대신 아이를 낳아줄 씨받이로 팔려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배신감과 충격이 컸지만 어쩔 수 없이 본부인과 함께 살게 되었다고 한다. 2년 뒤 딸을 낳자 조 할머니는 딸을 빼앗기고 집에서 쫓겨나오게 되었다. 이후 딸 가까이에 살면서 딸이 크고 시집을 가는 것을 지켜보며 재혼도 하지 않고 혼자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딸은 이 사실을 다 커서야 알게 되었고, 고모와 조카딸이라는 관계로 가까이 살면서 친어머니를 조금씩 도와주고 있었다며 눈물을 쏟았다. 딸은 그러고 보니 김 할아버지 얼굴이 돌아가신 아버님과 닮은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이 시간을 통해 직원들은 조 할머니에 대한 여러 가지 사정을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할머니의 행동을 문제행동 혹은 치매로 인한 이상행동으로 치부하기를 멈추고, 왜 그런 행동을 하시는지 먼저 이해하고자 노력하고 감싸 안으려는 태도를 갖게 되었다.


또한 10회에 걸쳐 진행된 포커스 그룹 연구를 통해 의료적인 약물치료를 병행하지 않으면 할아버지에 대한 집착과 질투심을 조절하기 힘들겠다는 결론을 얻게 되어, 딸과 상의하여 약물치료도 병행하게 되었다.


약물치료를 시작한 지 약 2주가 지나자 조 할머니의 신체적인 움직임이 약간 둔해졌지만, 아무에게나 시비를 걸던 모습이나 김 할아버지에게 집착하는 모습이 거짓말처럼 사라지고 다른 어르신들과 사이가 좋아졌다.


이런 기적 같은 변화에 모두가 평온한 생활을 되찾았다. 어느 날 오후에는 조 할머니와 이 할머니가 노래방기기의 반주에 맞춰 손을 잡고 노래하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연분홍 치매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조 할머니는 치매라는 세계 속 어디쯤에서, 누구를 그리며 이 노래를 흥얼거리고 계시는 것일까? 봄날이 쉬이 지나가는 것처럼 이제 조 할머니의 고통스러웠던 세월도, 기억도 쉬이 지나가기를 가만히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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