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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양희] 삶으로 배운 ‘감사’

2019-05-17 입력 | 기사승인 : 2019-05-17

삶으로 배운 ‘감사’


행복 바이러스가 전파된 듯

서로 배려하는 아름다운 공동체


20대 초반에 복지의 길로 접어들어 돌봄이 필요한 ‘어르신들의 벗’이 되고 싶어 복지와 결혼한 지 벌써 34년째이다. 어르신들과 함께한 시간만큼 내 삶도 영글어갔다. 녹록치 않았던 지난 시간과 사건들 속에서 수많은 사람들, 사연들을 만났다. 그 시간 속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K 어르신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2001년 주간보호센터를 시작한 지 1년도 채 되지 않았을 때였다. 우리 센터를 이용하시는 한 어르신의 아드님이 이웃에 사는 어르신에 대한 안타까운 사연을 들려주었다. 마침 그 댁 근처에 봉사자가 살고 있어서 좀 더 자세한 사정을 알게 되었는데, 참으로 딱한 상황이었다.


K 어르신은 꽃다운 열여섯에 양가 부모님들의 중매로 이웃 마을 총각과 결혼을 했다. 4남매를 잘 키워냈고, 부지런하고 알뜰살뜰하다고 이웃 사람들에게 칭찬이 자자했다고 한다. 하지만 남편은 젊은 시절부터 바람을 피우며 자신의 쾌락을 위해 흥청망청 살다가 지금은 몸이 약해지고 허리도 다쳐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다. 자녀들은 모두 멀리 살고 있고, 부모님의 생활에 큰 관심이 없어서 어르신은 끼니를 잇기도 힘든 상태라고 했다.


나는 그날로 사회복지사와 함께 어르신 댁을 방문하였다. 구불구불하고 좁은 골목길을 지나 허름한 나무대문 앞에 도착해서 문을 두드리며 큰 소리로 어르신을 불렀다. 아무런 대답이 없어 가만히 대문을 밀자 삐그덕 소리를 내며 문이 열린다. 안에 들어서면서 ‘계세요?, 아무도 안 계세요?’ 하고 몇 번이나 어르신을 불렀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문간 옆을 보니 작은 방문 앞에 검은색 고무신 한 켤레가 눈에 띄었다.


가서 방문을 열어보니 허옇고 덥수룩한 머리를 한 어르신이 쭈그리고 앉아서 비쩍 마른 손으로 방바닥을 쓸어 무언가를 모으고 계셨다. 얼핏 봐도 영양 상태나 위상 상태가 심각해 보였다. 가까이 가서 보니 어르신이 짚이 섞인 황토벽에서 떨어지는 흙 부스러기를 쓸어 모아서 입에 넣고 계셨다. 깜짝 놀라 어르신을 부르며 방으로 뛰어 들어가 손을 잡았다. 배가 고파서인지, 치매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K 어르신의 눈이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우선 챙겨갔던 보온병에서 물을 한 컵 따라 드리자 한 방울도 남김없이 다 드셨다. 일어설 기력도 없으신지 엉거주춤 쭈그린 자세로 다시 방바닥을 더듬다가 방 저쪽을 멍하게 응시하고 계셨다. 간단한 대화만 겨우 가능할 정도로 의사소통도 원활하지 않았다. 이웃 아주머니와 봉사자와 의논한 끝에 어르신을 우리 센터로 모셔왔다.


어르신이 불안해하지 않도록 간단한 음료를 드시게 하고 차근차근 설명을 해드렸다. 얼마 만에 하는 목욕인지 희고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서로 엉켜 있어서 따뜻한 물로 샴푸를 서너 차례나 감기고 린스도 해드렸지만 쉽게 풀리지 않았다. 급한 대로 대충 가위질을 해서 엉킨 머리카락을 손질해드렸다. 혹시 너무 지치실까봐 서둘러 물기를 닦고 새 옷을 입혀드렸다.


목욕으로 기분이 좋아지셨는지 편안해 하시는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워 천사처럼 보였다. 부드러운 죽과 과일주스를 준비해드리자 허겁지겁 맛있게 잘 드셨다. 숨죽이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다른 어르신들과 직원들, 봉사자들 모두 안타까운 마음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한참을 드시더니 배가 부르신지 뒤로 물러나 앉으시며 ‘고마워요’ 라고 인사를 건네셨다. 우리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자기도 모르게 일제히 박수를 쳤다.


잠시 쉬시도록 이부자리에 눕혀드리자 바로 잠이 드셨다. 한 시간 정도가 지나자 어르신이 슬며시 일어나 쭈그려 앉으시더니 그대로 소변을 보시려는지 주섬주섬 바지를 내리셨다. 한 봉사자가 황급히 달려가 대야를 엉덩이 밑에 넣어드리자 아무렇지도 않은 듯 시원하게 소변을 보셨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편하게 지내시도록 최대한 배려하면서 잘 지켜보기로 했다. 시간이 좀 지나자 낯선 공간을 느껴보려는 듯 완전히 일어서지는 못 하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손으로 방안을 더듬거리면서 다니셨다.


간식 때가 되어 어르신들과 직원들이 함께 둘러앉아 자기소개도 하면서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자신의 이름은 잊어버리셨고, 택호(○○댁)만 기억하고 계셨다.


어르신을 주간보호프로그램에 참여하시게 했더니 이따금 관심을 기울이시는 모습이었다. 눈이 잘 보이지 않고, 말수가 워낙 적으셔서 조용하게 지내셨다. 주간보호프로그램을 다 마치고 어르신을 댁으로 모셔다드려야 하는 데, 이만저만 걱정이 되는 게 아니었다. 주말에는 혼자서 어떻게 지내실지…….


주말에 중요한 일정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이웃 아주머니께 주말만이라도 관심을 가져주시라 당부를 드리고 도시락을 맡겨놓고 돌아왔다. 월요일 아침이 밝자마자 어르신을 모시러 갔다. 예상대로 다시 엉망이 된 어르신 모습에 말문이 턱 막혔다.


어르신의 배고픔과 외로움이 손에 잡힐 듯 눈에 보였다. 인사를 드리고 봉고차에 태워 센터로 왔는데, 첫날과는 달리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이었다. 표정을 보니 대변이 마려우신 듯해서 변기에 앉혀드렸다. 하지만 더 불안한 표정으로 앉았다 일어서기를 반복하시더니 살려달라고 소리를 지르셨다.


관장약을 먹인 후, 다시 화장실로 모시고 가서 관장을 시도했다. 괄약근 주위가 빨갛게 부어 있어 대변이 볼 수 없는 상태였다. 너무나 고통스러워하셨다. 황급하게 119에 전화를 걸었더니 구급차가 다른 지역으로 출동을 가서 바로 올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미지근한 물을 많이 마시게 하고, 기도하는 심정으로 장 마사지를 계속 하자 결국 관장에 성공했다. 실로 엄청난 양이었다. 그러자 괴로워하던 어르신의 얼굴이 편안해졌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굉장한 경험이었다.


어르신에 대해 사례관리를 시작했다. 첫 회의 때, 어르신의 욕구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의논하던 중, 손바닥에 난 상처도 심각한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랜 시간 영양이 제대로 공급되지 않았고, 방바닥이나 벽을 더듬어서 떨어지는 먼지나 흙을 손바닥으로 쓸어서 혀로 핥아 드셨기 때문에 손바닥과 손가락 이곳저곳이 짓물러 있었다.


소독을 하고 치료해서 붕대를 감아드렸지만 답답해서인지 붕대를 물어뜯어 풀어버리곤 했다. 다시 치료한 뒤, 이번에는 붕대 위에 수술용 글러브를 끼워서 한 번 더 감싸드렸다. 그러자 이번에는 글러브를 낀 채 방바닥을 쓸어 또 입에 넣으셨다. 나와 직원들이 번갈아 가며 어르신 손을 잡고 간단한 놀이를 하고, 간식을 자주 입에 넣어드리면서 1:1 맞춤형 프로그램을 지속해서 해드리자 상처가 조금씩 아물기 시작했다. 어르신의 외로움과 아픈 가슴도 함께 치유되기를 기도했다.


이렇게 우리는 최선을 다해 어르신을 보살폈다. 얼마쯤 지나자 어르신도 많이 안정되었고, 생각보다 잘 적응하셨다. 동료 어르신들과 직원들, 봉사자들과도 점점 더 정이 깊어졌다. 진정한 사랑과 정성 어린 보살핌을 받으며 마음의 평안을 되찾으셨다. 어르신의 표정만 봐도 얼마나 행복해하시는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평소에는 말씀이 거의 없으시지만 식사 때나 간식 때, 목욕 후에 항상 뭔가 설명해드리면 웃으면서 ‘네, 고맙습니다’ 라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으셨다.


어르신 덕분에 다른 어르신들도 서로 감사 인사를 나누는 분위기가 생겼고, 직원들과 봉사자들에게도 행복 바이러스가 전파된 듯 서로 배려하는 아름다운 공동체로 성장해갔다.


그렇게 어르신은 가족처럼, 아니 가족 이상으로 정다운 나날을 보내다가 치매와 만성질환이 악화하여 인근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그리고 몇 해 전 천국으로 가시게 되었다.


이제는 하늘에서 편안한 모습으로 ‘고맙습니다’라는 인사를 건네고 계실 것이다. 오늘따라 어르신의 모습이 더욱 또렷하게 떠오른다. 말이 아닌 삶으로 ‘감사’ 를 가르쳐 주신 어르신. 제 복지 인생에 크고 깊은 가르침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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