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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선남] 지금의 '일붕'이 있기까지

2019-05-17 입력 | 기사승인 : 2019-05-17

지금의 ‘일붕’이 있기까지


영정사진과 유품들을 머리맡에 가지런히 정리해놓고

두 분이 손을 꼭 잡은채 살던 모습 그대로 돌아가셨다.


1996년 4월, 공사업자들 간의 분쟁으로 지루하고 길었던 공사가 끝나고, 드디어 유료양로시설인 일붕실버랜드의 문을 열었다. 하지만 본인이 돈을 내고 복지시설에 들어간다는 인식이 거의 없던 시절이라 실버랜드는 문을 열자마자 휴업 상태에 들어갔다. 그런데도 기본적인 인건비, 관리비, 건축비 대출이자까지, 하루하루를 겨우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그다음 해에 IMF 외환위기가 왔다. 자식들 먹고살기도 힘든데 부모가 돈을 내고 실버타운에 입소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이미 입소해 있던 분들까지 자식들의 회사 운영이 어렵다며 입소 보증금을 찾아 나가기 시작했다. 암담한 상황이었다.


연기금을 대출받아 건축을 시작했거나 완공하여 개원을 준비 중이던 시설들이 속속 문을 닫는다는 소식이 매일 들려왔다. 더욱 위기감이 몰려왔다. IMF 위기는 쉽게 회복될 것 같지 않았다. 우리 시설은 도시와 멀리 떨어져 있어서 아무리 홍보를 해도, 와서 둘러보고는 어르신이 적어서 썰렁한 분위기 탓인지 선뜻 결정을 내리지 못 하고 돌아가기가 일쑤였다.


특단의 대책으로 일단 몇십 명이라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나도록 보증금 없이 월 생활비 30만 원으로 서너 달 살아보고 결정하라는 전략을 세웠다. 일단 보증금 떼일 염려가 없어지니 한 사람, 두 사람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다. 방 100개에 50명이 입소하자 서서히 생활 형태가 갖춰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IMF 위기를 겨우 모면하고 있을 무렵, 생각지도 않게 한 방송에 우리 시설이 소개되었다. 2000년 ○○월, 모 방송국의 고발 프로그램에서 ‘중산층 노인, 갈 곳이 없다’ 라는 내용으로 서울 파고다 공원에 모여드는 어르신들의 모습과 수억 원의 보증금과 월 이삼백 만 원을 부담해야 하는 실버타운들을 질타하면서 평생 5천만 원만 내면 평생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있다며 우리 시설을 자세하게 소개하게 된 것이다.


방송의 위력은 실로 대단했다. 그다음날부터 업무가 마비될 정도로 문의전화가 폭주했다. 입주가 전부 완료된 것은 물론, 방이 모자랄 정도였다.


하지만 처음부터 자금이 부족한 상태에서 시작했던 터라, 5년 만에 대출원금과 이자를 모두 상환하고 나니 또 살길이 막막해졌다. 대기자를 받아놓은 상태에서 방 30개를 증축하여 입주까지 완료가 되었다. 하지만 비교적 건강한 남녀 어르신 120여 명이 공동생활을 하다 보니 생각지도 못한 문제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1인 1실을 사용하다 보니 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몰라 늘 마음 한구석이 불안했던 게 사실이었다. 아침에 식사하러 나오지 않아 문을 열고 들어가 보면 돌아가셨거나, 심지어 자살하신 경우 등 비상 장치로는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을 매번 겪게 되었다.


꽤 오래전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90살 된 할머니 혼자서 입주하겠다고 찾아왔다. 나이 90이 됐으니 살면 얼마나 살겠냐고 입소금을 깎아 달라 떼를 썼다. 할머니 성화에 못 이겨 할머니 말씀대로 해 드렸는데 무려 101살이 되어서야 돌아가셨다. 돌아가실 때까지 매우 정정하셔서 병원 근처에는 가보지도 않았다. 그날도 병원에 안 가려고 하셔서, 걱정되는 마음에 나는 할머니와 함께 한 이불을 덮고 잠이 들었다.


한밤중에 깨어보니 할머니는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다. 장례식장에 연락해놓고 운구차가 올 때까지 잠시 누워 있겠다는 것이 그대로 또 잠이 들었나 보다.


장례식장에서 온 직원과 내가 같이 할머니를 들것에 들고 나가는 모습을 지켜본 옆 침대 할머니가 다음날 관장이 돌아가신 할머니와 함께 잤다고 소문을 냈다. 졸지에 시체와 함께 잔 여인이 돼 버렸다.


또 한 번은 인천에서 온 노부부였는데 젊었을 때 보일러 설비 일을 하셔서 보일러 할배라 불리었다. 20년이 지나도록 잘 사셨는데 할머니의 치매 증상이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당시 두 분 다 당뇨병을 앓고 있어 관리하고 있었다. 일주일 정도 인천에 다녀온다고 나가신 분들이 인천 따님네 안 가신 것을 알게 되었다. 비상키로 방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아연실색했다.


영정사진과 유품들을 머리맡에 가지런히 정리해놓고 두 분이 손을 꼭 잡은 채 살던 모습 그대로 돌아가셨다. 그동안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너무 행복하게 잘 살았노라고 나에게 고맙다는 편지를 남겨놓은 채, 두 분 만의 여행을 떠나신 것이다.


두 분을 모시고 읍내 병원 응급실로 달렸다. 응급조치가 이루어지고 한 분은 대학병원으로 다시 이송되고… 아무튼 긴박했지만 그땐 두 분 다 살릴 수 있었다.


그리고 그 후부터는 외박, 외식하러 나가시는 분들을 꼭꼭 챙기게 되었다.


마침내 연기금으로 빌린 돈을 5년 만에 모두 상환하고 2002년 5월 드디어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고 2005년부터는 지역사회 노인들을 돌볼 수 있는 가정봉사원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별도의 건물 없이 일붕실버랜드에 사무실을 두고, 더부살이했다. 실버랜드 주방에서 도시락을 준비하고, 목욕차량의 물도 실버랜드에서 정수한 물을 싣고 나가서 거동이 불편한 재가 어르신들 목욕봉사를 하고 다녔다.


그 후 장기요양보험제도가 도입되면서 너도 나도 목욕차를 사서 사업을 시작했다. 그동안 공동모금회에서 받은 차로 이동목욕을 하던 시절과는 너무나 다른 상황들이 펼쳐졌다. 한 사람의 목욕대상자를 수입사업의 대상자로 생각하는 인식이 만연해졌다. 그때까지 우리 지역에 목욕차라고는 1대 밖에 없었는데 좁은 지역에서 대여섯 대의 차량이 경쟁하게 되고 복지인식에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노인복지패러다임 변화에 따라 법인 노인복지사업의 궤도수정이 필요했다. 장기요양등급자를 모실 수 있는 요양원을 만들고 주간보호 사업도 시작했다.


이동목욕차는 다른 개인 기관들이 서로 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우리는 이동목욕이 필요한 요양등급 외의 사람들이나 오지의 취약주민을 대상으로 무료 이동목욕을 진행했다.


우리 법인의 모체가 할 수 있는 유료양로시설은 여전히 어렵게 운영을 하고 있지만 비교적 저렴한 비용 덕분인지 전국에서 꾸준히 입주자가 들어와 너무나 다른 성향을 가진 100여 명의 어르신들이 오늘도 아웅다웅 한솥밥을 먹으며 살아가고 있다.


어르신처럼 여러 이유로 사회적 보호를 받을 수 없는 분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내가 선택하고 나아갈 이 길 위에서 과연 이것이 진정으로 그분들을 위한 것인지, 진정 옳은 결정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어 괴롭다. 때로는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외로울 때도 있다. 그래도 이 길을 포기할 수는 없다. ‘인권’ 이 ‘일상’ 이 되는 날까지 쉼 없는 달음박질을 계속 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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