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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과 함께하는 보람찬 시간' 박혜란 사회복지사

2016-10-25 입력 | 기사승인 : 2016-10-25

  한국 나이로 쉰하나. 중년 여성의 이마와 눈가에는 실주름이 깊게 배어 있었다. 두꺼운 손마디에서는 삶의 관록이 묻어났다. 인생이 주는 훈장이었다. 

  박혜란 씨는 올해 3년 차 사회복지사다. 2014년 경기 부천시 하나노인복지센터 사회복지사로 재취업한 박 씨는 한 달에 한 번 어르신들의 집을 방문해 복지 서비스를 제공하고 각종 행정업무를 처리한다. 현재 그가 관리하는 어르신은 30명. 그가 분초 단위로 움직이는 이유다. 

  “하루에도 여러 번 경기 부천에서 시흥으로, 안산에서 인천으로 이동해요. 2년간 일하다 보니 올해 ‘신입’ 딱지를 뗐네요. 사회복지사 중에는 연장자이지만 어르신들 사이에서는 ‘젊은이’입니다.” 

  박 씨는 영양사로 오래 일했다. 대학에서 식품영양학을 전공한 그는 1986년 식품회사 영양사로 입사했다. 배치된 일터는 수백 명의 직원이 이용하는 구내 직원식당. 영양사 업무는 ‘이상’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영양학적으로 균형 잡힌 식단을 구성한다는 매뉴얼과 달리 한정된 예산에 맞춰 식단표를 짜야 했다. 단가를 맞추느라 저렴한 식재료를 발주하다 보면 국내산보다 수입산을 사용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영양사가 발휘할 수 있는 재량권이 적었다. 그래도 박 씨는 6년간 업무를 도맡았다. 


 15년간 한 직장에서 영양사  *  식당 위탁 운영 
 새로운 일 찾아 일본행… 공부  *  사업 준비하다 경력 단절 

  반복되는 업무와 협소한 재량권이 직장생활을 권태롭게 만들 즈음 박 씨에게 새로운 일이 찾아왔다. 회사로부터 위탁을 받아 구내 직원식당을 운영하던 직원이 건강상의 이유로 더 이상 일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회사는 박 씨를 후임자로 지목했다. 일을 맡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직장생활의 활기를 되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1992년 박 씨는 구내 직원식당 위탁 운영을 맡았다. 

  일은 생각했던 것과 달랐다. 이 역시 한정된 예산 안에서 식재료를 구매하고 음식을 만들어야 했다. 영양사로 근무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럼에도 박 씨는 9년이나 구내 직원식당을 운영했다. 한번 일을 시작하면 끝을 봐야 하는 그의 성미가 발휘된 거였다. 

  “영양사로 일을 시작했지만 구내 직원식당 운영을 더 오래했어요. 15년간 한 직장에서 근무하니 다른 일에 도전하고 싶더군요. 무엇보다 나의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었어요.” 

<박혜란 씨는 “늦은 나이에도 새로운 직업에 도전해 재취업에 성공할 수 있었다”며 “섣부른 포기는 금물”이라고 말했다.>

  이번에는 박 씨가 일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마침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무역을 하던 지인이 그에게 일본에서 식당을 차려볼 것을 권했다. 일본에서는 작은 식당도 장사가 잘돼 자리만 잡으면 성공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무엇보다 박 씨가 한국에서 일한 경험을 충분히 활용할 수 있을 거라고 했다. 

  어려서부터 유학에 대한 동경을 품었던 박 씨는 일본으로 건너가 제2의 삶을 도모하기로 결심했다. 그의 결정에 가족과 친구, 지인이 박수를 보냈다. 서른일곱의 박 씨는 부푼 꿈을 안고 일본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2001년 초의 일이었다. 

  그가 첫발을 내디딘 곳은 일본 오사카. 어학원에 등록해 1년 반가량 일본어 공부에 매진했다. 식당을 차릴 곳도 알아봤다. 지인의 말마따나 3평 남짓한 작은 식당이 상당히 많았다. 특이한 건 소규모 식당이라도 대형 냉장고를 대여섯 대씩 두고 있는 거였다. 

  곧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일본인은 적은 양의 음식을 다양하게 맛보고 싶어 했다. 이 때문에 식당마다 메뉴판이 벽면을 가득 메울 정도로 다양했고, 식당 주인은 고객이 어느 메뉴를 주문할지 알 수 없으니 모든 식재료를 준비해야 했다. 박 씨는 혀를 내둘렀다. 한정된 예산으로 단체급식을 했던 그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일본어 실력도 박 씨의 발목을 잡았다. 고객을 상대하며 장사를 하기에는 버거운 언어 실력이었다. 식당을 열어보지도 못하고 꿈을 접어야 했다.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왕 일본까지 온 거 뭐라도 해야 했다. 자신의 성공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과 지인들을 볼 면목이 없었다. 

  “당시 친구들 대부분이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며 살고 있었어요. 아직 결혼하지 않았던 저는 자유로운 몸이었죠. 그래서 공부와 사업을 하겠다며 일본행을 선택할 수 있었고, 이런 저의 결정이 옳았음을 성공으로 주변 사람들에게 증명해 보이고 싶었습니다.” 

  다른 일을 찾아보기로 했다. 지인을 통해 외국인도 일본 관세사 자격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마지막 도전이라는 심정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두 번 시험에 응시했지만 불합격의 고배를 마셨다. 일본어가 유창하지 않은 데다 일본에서 홀로 지내느라 많이 지쳐 있었다. 2006년 말, 박 씨는 6년간의 일본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으로 떠날 때만 해도 사람들이 박 씨를 부러워했지만 정작 그가 이룬 것은 하나도 없었다. 

  “일본에서 새로운 삶을 살겠다며 도전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곳에서 6년간 경력이 단절됐어요. 비싼 수업료만 치르고 돌아온 셈이었어요. 당시에는 남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고 살았는데 그러다 보니 인생의 바닥으로 떨어진 기분이었습니다.” 


 시흥새일센터 통해 사회복지행정사무원 역량 갖춰 
 인생의 굴곡 겪은 후 삶을 대하는 태도 깨달아

  재기해야 했다. 박 씨는 역량을 발휘할 수 있고 오랫동안 활동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그때 발견한 것이 사회복지사였다. 한국 사회가 실버 시대로 들어서면서 사회복지사의 수요가 늘어나던 때였다. 박 씨는 2013년 사회복지사 2급 자격증을 취득했다. 고용노동부 국비 지원 직업훈련을 통해 취업을 연계하는 취업성공패키지와 장년인턴제 취업제도를 신청했다. 하지만 당시 마흔아홉의 초짜 사회복지사를 받아줄 곳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낙심하지 않았다. 기동력이 뛰어난 청년층 사회복지사와 차별화하려면 다른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사회복지행정사무원으로 방향을 틀었다. 마침 시흥 여성새로일하기센터가 사회복지행정사무원 3개월 양성과정을 개설한 터라 취업을 준비할 수 있었다. 

  인생의 기회가 다시 박 씨를 찾아왔다. 어르신 대상으로 재가방문요양서비스를 제공하는 하나노인복지센터가 중·장년 여성 사회복지사를 찾고 있다는 연락을 받은 것이다. 

  일본에서 보낸 6년은 박 씨에게 어떤 의미일까. 
  “남들 눈에는 성공하지 못한 삶으로 보이겠지만 그 덕분에 사람마다 삶을 사는 방법이 모두 다르고, 그 또한 의미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쩌면 이런 경험이 인생을 마무리하는 어르신들을 돌보게 하는 원천으로 작용하는지도 모르겠어요.” 
돌고 돌아 다시 제2의 인생의 출발선에 선 이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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